[부러진 화살]


카프카의 [심판]에서 주인공 k는 내용이 없는 선고를 받는다. 죄가 있기에 유죄판결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유죄판결을 받았기에 죄가 있는 부조리한 상황. 인간의 인지능력과 발전가능성을 믿었던 근대에는 카프카의 소설은 실존주의, 더 나아가서는 초현실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정에서 벌어지는 블랙 코메디같은 상황을 보면 카프카의 소설이 되려 진정한 리얼리즘 소설로 재인식되는 슬픈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석궁 사건"을 신문기사로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은 '판결에 불만이 있다고 판사를 석궁으로 쏘다니, 교수가 일반인보다 개차반이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법원은 올바르고 정확한 판결만을 내릴 것이라고, 세상이 썩었어도 정의의 최후 보루가 되어 줄 꺼라고 대한민국 사법제도를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 진실과 매스컴에 보도된 내용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어이없는 판결을 연이어 접하면서 "법"이라는 것이 때로 얼마나 자의적인 해석을 일삼으며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는지 깨달으며 상당한 환멸을 느꼈다.
심각한 것은 이것이 공정한 사회에서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한 이례적인 케이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김교수를 응원하는 이들이 특별히 정의감에 불타는 이들이 아닌 자신들도 사법제도에 피해를 당한 이들이듯이 영화가 반향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법부의 권위적이고 자의적인 행태가 정치적인 문제나 사학재단과의 결탁이라는 외부요건이 주원인이 아니라 사법제도 내부의 작동방법이라는 것이 더 문제이다. 법에 복종해야 할 사법부가 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 이미 판사가 결정을 내린 상태에서 요식적인 절차만 밟다 일방적인 판결을 남발하는 행태. 과거 독재정권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모순어법으로 독재를 정당화했듯이 요즘도 억울한 감이 있고 다퉈볼 요지가 있다해도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고 유죄판결의 빌미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반성하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시원한 해법은 없지만 영화를 보고 느낀건 김교수처럼 일단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는 거다 -.- 뭘 알아야 항의라도 하지.. 하긴 김교수는 그래서 재판부에 밉보였을 수도 있지만..
탄탄한 시나리오에 명배우들의 호연(장동건보다 원빈보다 송중기보다 역시 대한민국 영화계에는 안성기가 쵝오! 영화내내 푸른 수의만 입어도 웬만한 패셔니스타보다 겁나 멋지심 ), 심각한 주제를 지루하거나 도식적이지 않게 능수능란하게 풀어낸 감독의 연출이라는 3박자가 훌룡하게 맞아 떨어진 수작이었다. 특히 엔딩이 너무 마음에 든다!! 암울하고 열받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패배주의적 결론이 아니라 웃음기 섞인 카타르시스를 주며 관객들을 독려한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저항해라, 싸워라!라고.

by niji | 2012/01/24 01:19 | 영화 | 트랙백 | 덧글(0)

곽노현 교육감 판결에 대하여


곽노현 교육감이 1심에서 3,000만원 벌금형으로 일단 복귀했다. 임시적인 권한대행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취임식까지 해가며 서울시 교육을 구체제로 회기시키던 이대영 부교육감을 내세운 보수진영의 폭주를 일단은 막은 셈이다. 그러나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곽 교육감은 교육감직을 잃게 된다. 법원이 2억원의 대가성을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리면서도 일단 곽교육감을 복귀시키는 절충적인 판결을 내리면서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곽노현 교육감 판결문의 요지는 대강 이런 것 같다. (판결문 전문을 구해보려 했으나 내 검색 레이더가 후진 관계로 실패했다ㅠㅠ)
1. 곽노현 교육감은 돈거래에 대해 사전 인지하지 못했다.
2. BUT, 금액이 단순히 선의의 뜻으로 보기에는 너무 크며, 박명기 교수의 사퇴가 곽노현 교육감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등      객관적 정황으로 보아 건넨 돈의 대가성이 인정된다.

일단 주요 쟁점이었던 곽 교육감이 사전에 돈거래를 알고 있었느냐에 대해선 법원은 곽교육감의 손을 들어줬다. 문제는 사후에 건넸더라도 곽교육감의 주장대로 '선의에 의한 부조'가 아니라 박명기 교수의 사퇴에 대한 '대가'라고 본 것인데 상당히 애매하다.
1. 박명기 교수 사퇴 = 곽노현 당선이라는 공식은 확률일 뿐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전에 당선 확률을 높이기 위해 돈을 실제로 준다든지 언약을 한다든지 해야 하는데 곽교육감이 합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법원이 인정했다. 막말로 나중에 돈 안 줘도 그만 아닌가. 차후에 선거 분석에서야 단일화를 해서 이겼다는 내용이 나오겠지만 박교수가 사퇴해서 곽교육감이 당선됐으니 돈을 줘야 한다는 의무는 곽 교육감측에 없는 것이다.
2. 그래서 곽교육감은 주겠다는 사전 약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준 것은 선의라고 말해서 많은 이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그런데 때때로 정말 선의로 2억을 줄 수 있는 이도 세상엔 있다. 사실 곽교육감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야말로 '믿음'이 필요하다. 이는 사실관계가 아닌 윤리의 문제인데 윤리적 문제는 증명하기가 어렵다. 우리 00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는 팔이 안으로 굽고 자기 식구 감싸기식의 무대포적 동족의식과 구별이 불가능하기에 진보진영에서도 곽교육감을 사퇴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모두에게 똑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공정성의 발로일 것이다.

법은 공정하고 적확해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력에 휘둘린다는 현실적 문제 말고도 다양한 사회현상을 일률적으로 재단하기란 불가능하다. 법도 결국은 해석하는 것이다. 그 해석의 책임을 져야하는 법관들의 부담감은 그가 양심적이라는 전제 하에 막대할 것이다. 김형두 판사는 판결문 내용이나 귀동냥한 법정 분위기로 보나 평소의 평판으로 보나 비교적 공정한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이나 워낙 정치적인 문제고 보수/진보 양진영이 양보하기 힘든 문제이기에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나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판결에 아쉬움이 크다. 보수진영의 교육관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고 그들의 교육정책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막고 싶기에 다소 논리의 비약을 감수하면서도 곽교육감이 무죄 판결을 받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곽교육감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난감한 교육문제를 다 해결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성적지향에 따라 차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교육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하면 진보/보수 중 어느 쪽이 진리라고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절대진리가 존재하고 인간이 발전하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확신이 깨지면서 어느 쪽이든 내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절대진리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싸운다. 그러나 이는 이기는 쪽이 진리라는 힘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십상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도착한 곳은 객관화할 수 없는 윤리학의 영역이다. 나는 윤리적 측면에서 곽교육감을 믿는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by niji | 2012/01/23 10:41 | 그외 | 트랙백 | 덧글(0)

가카헌정방송 "나는 꼼수다"를 위한 변명

요즘 최고의 화두는 단연 "나꼼수"기에 나도 숟가락 한번 얹어보기로 했다. 미리 부언하자면 나는 나꼼수의 열렬한 팬이다. 아이폰이 없는지라 mp3로 다운받아 듣기에 나꼼수의 세계 1위에 도움이 못 되는 것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늦게 시작한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얘기만 듣다가 뒤늦게 나꼼수에 빠졌는데 지금 아껴가며 23회까지 들었다. 이걸 다 들으면 나도 다른 나꼼수의 팬들처럼 다음회를 기다리며 금단증상에 시달릴까봐 걱정이다. 그때는 재탕 아니면 나는 꼽사리다까지 섭렵해야 하겠지...

나꼼수에 대한 비난중 대표적인 것은 "경박하다" "괴담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선동한다""편향적이다" 는 것이다.

솔직히 "경박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다른 뉴스나 신문처럼 근엄하게 폼잡지 않고 네남자가 웃어가며 욕도 해가며
 산만하게 수다떠는 게 언론답지 않다는 걸까? 아니면 확인되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흘리거나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일까?

일단 첫번째, 나꼼수에서 비속어와 욕을 하는 것에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나꼼수에 더 재미를 느끼는 나같은 이들도 많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개인적인 취향 차이다. 나꼼수는 예전 조선시대에 마당놀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대부의 실상을 까발리며 풍자한 마당놀이에는 당시 서민의 언어였던 육두문자와 비속어가 남발했고 이는 일반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데 큰 역활을 했다. 개인적으로 나꼼수의 형식도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있는 기존 미디어의 틀에 박힌 형식 대신 일반인의 언어와 친구들끼리 함께 수다떠는 듯한 포맷을 차용한 것이 정치의 일상화를 이끌어 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꼼수가 다루는 주제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거니와  4인방 또한 만만한 인물들은 아니다. 언론사 사주, 정치평론가, 시사정론지 기자, 그리고 전직 정치인까지. 그러나 이들이 일상언어로 우리가 그러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만만한, 같이 놀 수 있는, 같이 수다떨 수 있는 친밀한 이웃처럼 다가온다. 마당놀이의 또하나 특징은 소위 말하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즉 관객과의 소통이다. 나꼼수는 기존 미디어처럼 듣기 싫어도 듣게 되는 무차별 방송이 아니다. 자기가 억지로 찾아 듣지 않으면 들을 수도 없는 음원파일이다. 나꼼수는 청취부터 전파, 확대재생산까지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존속될 수가 없다. 이것이 대중으로 하여금 나꼼수를 기존의 미디어와는 다른 나만의 것,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두번째, 나꼼수가 사실을 왜곡한다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 즉 괴담을 퍼뜨려 사람들을 선동한다는데 난 나꼼수에서 나온 얘기중 어떤 걸 괴담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이들이 팩트라고 밝히는 것들은 모두 기존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거나 단신처리한 "사실"들이다. 이걸 퍼즐 맞추듯 서로 짜맞출 때는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소설"이라고 말하는데 일단 현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나꼼수에서 제공해 주는 "팩트"들을 듣다보면 김총수보다는 어설퍼도 이미 청취자들의 머리 속에도 "소설"의 나래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나꼼수에 선동당한 것이 아니고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던 상태에서 나꼼수가 일반 시민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물증을 제공해 주자 반기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이덕일씨가 한 말 중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대중적 글쓰기"란 쉽게 쓰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알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라고. 대중이 나꼼수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알고 싶어했던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꼼수의 팬들에게 나꼼수는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신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심증에 확신을 더해주는 "무기"인 것이다. 더구나 선관위 홈피 테러, BBK, 저축은행 모두 나꼼수에서 제기한 의혹들이 사실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런데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냐! 제발 비판하려면 나꼼수에서 제기한 의혹 중 "괴담"이 정확히 어떤 건지 사례를 들어 지적해 줬으면 좋겠다. 무조건 '괴담이다' '선동이다'라고 앵무새처럼 외치는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하는 짓이야말로 선동이잖아!

세번째, 나꼼수가 언론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나는 언론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로 논하는"것이니까. "논"하려면 당연히 자신의 입장과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언론은 원래 편향적이라는 거다. 문제는 자신의 편향성을 공개적으로 (미국에서는 신문사가 선거때 자신이 어느 정치인을 지지하는지 입장 표명을 한다.) 드러내지 않고 공정한 척 하면서 뒤로는 왜곡과 공작을 일삼는다는 거다. 나꼼수는 당당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힌다. 그리고 엄연한 "팩트"로 '추정"을 한다. 이 세상에 절대 진리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공정한 척 중립적인 척 위장하지 않는 거다. 다수의 언론이 "편향적으로 공정한" 것을 감안할 때 "공정하게 편향적인" 나꼼수가 오히려 참 언론에 가깝다. (난 이 두 문구가 늘 헷갈려 ㅠㅠ 바뀐 거라면 누구든 비웃지 말고 지적해 줘!)
"경박하다"는 개념 또한 나름대로 정리해 봤다. 내 생각에 "경박한 언론"은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예인 가십기사를 세상이 뒤집힐 일처럼 난리를 쳐가며 보도하고 bbk나 fta같은 중요사안은 단신처리하거나 아예 보도하지 않는 조중동을 비롯한 메이저 언론과 지상파 뉴스 말이다. 이 경박하기 짝이 없는 말로만 언론인 것들이 제대로 말해주지 않기에 사람들은 나꼼수로 몰린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어도 보수언론은 아예 이 사안에 대해 언급을 안 하는데 어디서 다양한 정보를 얻냐? 나꼼수는 자기들을 믿으라고 큰 목사님들처럼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러저러하고 그래서 우리는 "팩트"를 기반으로 이러저러하게 추정한다. 듣기 싫으면 듣지 마라! 말하자면, 나꼼수가 획득한 것은 "무오류성"이 아니라 "대중성"이다.

이 정도가 수구보수층에서 제기하는 나꼼수에 대한 비판이라면 진보적 진영에서는 조금 다른 식의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그중 하나는 나꼼수가 다수의 대중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비판이 불가능한 맹신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꼼수로는 근본적인 문제점, 즉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비판적인 목소리가 차단되어 버리는 집단은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듯이 물론 문제가 있다. 그러나 "비판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은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들뢰즈의 지적대로 "다수"는 단순히 수가 많은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헤게모니를 누가 잡고 있느냐'를 의미한다. 나꼼수가 주류라고 비판하기 전에 일반인들은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을 주류라고 느낀다. 조중동과 지상파는 돈과 권력을 쥐고 있지만 나꼼수는 입밖에 없다. 그런데 나꼼수가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는 이유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다수는 무조건 나쁘다"라는 또다른 단순논리로 귀착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나꼼수는 주류에 맞서는 비주류인데 나꼼수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는 나꼼수의 팬을 반발하게 만들 수도 있다. 대중은 이미 양비론과 결벽성에 의해 많은 것을 잃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비판을 하더라도 조금만 관점을 달리해 보면 어떨까? 다수가 열광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독일 국민이 나치를 지지한 것도 이유가 있고 가난한 이들이 부자를 위해 존재하는 수구세력에게 투표하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이 전유럽을 강타한 것도 이유가 있고 촛불집회에 수만대중이 몰려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논객들의 펜대 앞에 대중은 때로는 위대한 집단지성이 되고 때로는 전체주의적인 우민이 되곤 한다. 그러나 대중은 정의내릴 수 없어도 실존하며 이들의 동의와 힘을 얻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나꼼수의 무엇이 대중을 열광시켰는지를 먼저 분석해 보고 그 열광의 원인에 문제점이 있다면 이를 비판하는 것이 더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또하나. 자본주의를 폐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꼼수가 성에 안 차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나꼼수보고 낄낄대면 세상이 바뀌냐"라는 비판은 너무 냉소적으로 들린다. 진보적인 이들은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똑같다."라고 말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많은 이들은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고 느끼고 적어도 너무 심한 부정부패가 판치지 않기를, 경쟁을 해도 공정하게 이루어지기를, 정부가 토건사업보단 복지에 신경쓰기를 원한다. 나꼼수의 팬들은 나꼼수에서 정부의 꼼수가 파헤쳐질 때, 추운 날씨에도 5만의 인파가 모여 나꼼수에게 "쫄지마!"라고 힘을 실어줄 때, 조직도 돈도 없는 시민운동가가 선거에서 기존 정당에 승리할 때 자신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진보적 인사가 "이것은 진정한 세상의 변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는 나꼼수의 팬들과는 "다른 세상"을 상정해 놓고 있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세상만이 "진정한 세상"이라는 결론을 이미 내려버린 것이 된다. 여기에 어쩌면 나꼼수의 성공의 원인중 하나가 있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기존 진보적인 책들이 너무나 미래지향적인, 일반시민에게는 너무 먼(자신의 세속적인 개인의 욕망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도달하기에는 너무 먼 기약이 없는 이상향을 설정하고 오직 그것만이 진짜라고 말할 때 나꼼수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소소한" 대안들을 제시해 준다. (나꼼수에 대한 또하나 비판이 "대안이 없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꼼수만큼 소소하고 세심하게 일상적 대안을 제시해 주는 이들도 드물다. 이후의 상황을 주목하고 감시하라, 같이 버텨라, 집회에서 만나자, 투표하라 등등) 나는 유시민 대표의 책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저자는 혁명의 제반조건들을 몇가지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대중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변하지 않았음에 다수가 동의할 때"이다. 말하자면 대중은 현재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봐도 실패했을 때 최후의 보루로 혁명을 생각하는데 진보적 비판자들은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진짜 변화가 아니라며 부정하는 것이다. 진보적 인사들은 개혁과 혁명을 질적 차이, 즉 차원이 다르다고 보는 반면 대중은 양적 측면, 개혁이 쌓이고 쌓여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물론 여기서 일반 대중의 사적 욕망, 손아귀에 쥔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회피하려는 "비겁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계급의 문제에 치우쳐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많은 어려움을 낳았듯이 인간적인 두려움과 욕심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개인적 욕망이 거세된 혁명적 인간상을 강요할 때 운동과 대중은 분리되곤 한다. 대중은 스스로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알기에 "우리는 승리한다"라는 공허한 말보다 "쫄지마!"라는 현실적인 구호에 열광한다. (돌이켜 보면 김어준 총수는 개인의 욕망을 간파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것이 나꼼수 성공의 또다른 요인이었을 것이다.)

쓰잘데기없는 잡설이 너무 길어졌다. 여전히 나꼼수는 돈도 권력도 없는데 다수의 대중에게 선택받아 영향력이 커지면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파시스트처럼 인식되는 것이 억울한 마음에 주절거려 봤다. 마지막으로 얼마전 홍반장이 나꼼수에 출연했을 때 의도적인이지 진심인지 몰라도 한나라당과 mb 정권을 비판하는 나꼼수 4인방을 "민주당 대변인"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걸 들으며 짜증 이빠이 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반성한다. 내가 나꼼수의 비판자들을 모두 적으로 돌릴 때 나도 홍반장과 똑같은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당한 비판은 달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비판의 무조건적인 수용도 옳은 것은 아니다. 고문 휴유증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는 김근태 고문은 가장 최근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참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고 그 권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권력을 쟁취해야 하고 권력을 쟁취하려면 다수의 힘과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소수를 배려하고 포용하지 않는 다수는 절대화할 것이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누구보다 나꼼수 4인방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뭍든 나꼼수도 나꼼수의 정당한 비판자들도 다같이 쫄지 말자규. 그리고 진중권과 정봉주 싸우지 좀 말라규. 둘다 좋은 나로선 대략 난감하다규 -.-

by niji | 2011/12/18 11:55 | 그외 | 트랙백 | 덧글(0)

[칼의 노래] - 김훈

이제야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한참 뜨는 베스트셀러는 피하는 버릇이 있기도 하거니와 김훈에 대한 통념들, 가부장적인 허무주의자라는 이미지에 거부감이 들어서 읽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딱히 끌리는 책이 없어 별 기대없이 집어든 두권의 책의 서두에 있는 작가의 변을 읽는 순간 그 수려하고 간결한 문체에 확 꽂혀버렸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떤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왔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 (중략)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김훈의 문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찬사가 쏟아졌으니 나까지 한마디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황순원의 소설이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그 간결한 문체 때문에 끌렸듯이 김훈의 글 역시도 내용과는 별개로 얼마나 한국어가 품위있고 장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밖에는. 토씨 하나도 멋대로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김훈의 글은 완벽하게 짜여져 있다.
김훈 문체의 특징이라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간에 여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에피소드를 실태래처럼 줄줄 풀어가며 감칠맛나게 묘사하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미쟝센에 집착하는 글의 세공사이다. 마치 영화의 몽타쥬 기법같이 논리성이나 연속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때로 서로 모순되는 단어와 문장들을 신중한 장인의 손길로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이 모순되는 단어와 문장들은 서로 충돌하며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김훈의 글은 술술 읽히지가 않는, 독자가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암호문에 가깝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개연성을 배제한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된 문장들은 1+1=3식의 새로운 의미를 형성해내며 메꿔질 수 없는 간격, 구멍을 만든다. 그의 글이 내용과는 별개로 문체 자체에서 허무주의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는 것은 이 구멍(심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서평가 이현우(로쟈)는 김훈 글의 특징을 '가장의 허무주의'라 명명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이 아닌 [현의 노래]에 대한 글에서 나온 표현이긴 했지만 이 정서는 김훈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에 적용해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김훈의 글을 굳이 소설과 에세이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조은영 기자의 말대로 김훈은 "진정한 3인칭 소설"을 쓰지 않았고 별로 쓸 생각도 없는 듯 하다. 이역시 [현의 노래]에 대한 평이긴 하나 [칼의 노래]에서도 역시 주인공은 이순신이나 실제 화자는 이순신의 가면을 쓴 김훈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가족과 수군과 백성들을, 그리고 심지어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한" 권력(임금)까지 등에 짊어지고 힘겹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고단한 삶을 견디며 죽을 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순신만큼 "가장의 허무주의"를 잘 보여주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칼의 노래]의 부제는 "이순신,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이다. 이는 김훈이 굳이 이순신을 모델로 글을 쓰게 된 이유일 것이다. "칼"은 당연히 "펜"과 동일물이다. 다만 이 칼은 그냥 칼이 아닌 "순결한" 칼이다. 왜 순결할까? 아마도 밥벌이에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수군의 특성상 이순신은 칼을 직접 쓰는 일이 드물다. 수군은 붙어서 서로를 베고 찌르는 것보다 적의 배를 침몰시켜 한번에 많은 적을 수장시켜야 한다. 조선이 일본보다 군사 숫자와 배가 현저히 부족했기에 붙어서 칼싸움을 벌이는 것은 훨씬 불리하기에 더 그렇다. 소설에는 전투장면을 무협지마냥 다이나믹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적의 배를 부수어 나가는 지루하고 기계적으로 되풀이되는 노동- 모내기나 대형공장의 컨테이너 작업이 연상되는-에 자주 비유한다. 이순신이 칼을 직접 쓰는 것은 단한번, 아들 면을 죽인 일본 무사를 직접 벨 때다. 대인답게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순신은 부하의 만류도 거절하고 직접 그를 벤다. 이 장면은 그전까지는 일본병사들을 하나의 덩어리로서는 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이순신이 거의 유일한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행위를 하는 장면이기에 어색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김훈은 "통제사"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던 이순신이 "아버지"로서의 임무에도 충실해야 하는 고충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숱한 고민 끝에 이순신은 장수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칼을 든다. 복수는 사실 허무하면서 신성한 것인데 그것이 소득이 없는 데다가 자신에게 독으로 돌아올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복수는 패배가 예견되어 있는 싸움이다. 그리고 극중에서 이순신이 치루는 전투는 모두 그렇다. 전투가 끝나는 때 승패와 상관없이 이순신은 죽을 것이다.
김훈은 "한없는 단순성"이라고 하나 사실 소설 속의 이순신은 결코 단순할 수가 없다. 마치 햄릿처럼 그는 늘 고민하느라 밤을 지새운다. 적과 나 사이의 칼, 임금과 나 사이의 칼, 적과 임금 사이의 칼, 그 사이에서 이순신은 몸을 누일 자리가 없다. 그가 몸을 누일 수 있는 것, 단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이 전시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임금이 자신을 죽일 꺼라는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전시이기에 백성을 지키고 적을 섬멸해야 한다는 단순한 삶의 목적이 있기에 이순신은 살 수가 있다. 소설 속의 이순신에게는 죽음이 주된 것이고 삶은 단지 가장이기에 식솔들을 위해 견뎌야 하는 부차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삶은 무의미하고 단지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식의 이 허무주의. 김훈의 문체가 아름다워 허무주의마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지 허무주의가 원래 아름다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훈의 글은 분명 위험하리만치 매혹적이다.

사실 위인전과 사극과 친하지 않는 내가 이 소설을 읽게 된 데에는 한국의 위인들 중에 이순신 장군을 무척 좋아한다는 이유도 한몫 했다. 내가 원래 성실하고 사리사욕없는 겸손한 스타일을 선호하는데 생각해 보니 대한민국 국민중 이순신 싫다는 사람 잘 못 봤다. 한때 정치적 목적으로 미화시키고 영웅화했다는 비판 때문에 멀리하려 한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소설읽고 감동받은 김에 [난중일기]도 빌려 보았다. 사실 일기 형식의 소설이 아니라 진짜 일기는 소소한 기록의 연속인지라 남에게는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다. [난중일기]역시 오늘은 날씨가 어땠고 누구누구가 찾아와 만났고 어디어디 병영을 점검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큰 해전을 치룬다거나 누명쓰고 옥에 갇히는 등 독자들이 궁금해 할 사건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기를 쓸 여유가 없다. 그래도 읽다보면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자신의 공과에 겸손해하는 이순신의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풍모가 느껴진다. 어머니의 별세 이후 "(나는) 왜 어서 죽지 않는 것인가"며 통곡할 때나 아들 면이 죽은 후 애통해하는 글에선 [칼의 노래]의 이순신과 같은 인간적인 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오히려 [난중일기]의 이순신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에게서 더 약하고 고뇌에 찬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것은 김훈이 이순신에게 자신을 투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훈은 이순신을 통해 고뇌에 찬 한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모든 삶에 허덕거리는 가장은 위대하다는 가장 반영웅주의적인 메세지를 던진다. 보통 허무주의를 보수주의로 연결시키기기는 하지만 열심히 트윗을 날리는 이외수 선생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 인간은 오히려 사욕을 버리고 급진적이 될 수도 있다. 변화를 믿지 않고 죽음으로 돌진하면서 왜 그들은 안주하지 않는 것일까? 진정한 허무주의는 어설픈 진보보다 더 강렬한 폭탄이 될 수도 있다. 과대평가하고 위대성을 덧씌우지 않으면서오히려 인간은 타인에게 너그러워진다. 이것이 진정한 연민일 것이다.

by niji | 2011/11/21 14:33 | 독서의 괴로움 | 트랙백 | 덧글(0)

[프랑스 대혁명사]에 [혁명의 시대]를 꼽사리로 끼운다

빈번히 느끼는 거지만 글을 읽기는 쉬워도(물론 글 나름이겠지만 상대적으로) 글을 쓰는 건 참 힘들다. 책을 읽고는 단 몇 줄이라도 나름의 감상을 남겨놓으려 했지만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글쟁이'들이 참으로 대단해보이는 순간이다.

〈프랑스 대혁명〉이야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환상과 영감을 안겨주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정작 혁명의 자세한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던 차 쟝 마생의 『로베스피에르 - 혁명의 탄생』을 읽고 로베스피에르에게 꽂힌 김에 프랑스 혁명을 다룬 책을 찾아 보았는데 의외로 눈에 딱히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 중 선택한 것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가장 교과서적인 저작이라는 알베르 소부울의 『프랑스 대혁명사』인데 1994년에 발행된 촘촘한 활자의 책인데다 그나마 하권은 품절이다. 정장본으로 선명한 글씨체에 줄간격도 보기좋게 띠어져 있는 요즘 책들에 비하면 제본소에서 허접하게 나온 해적판같은 몰골이지만 구세대인 내게는 이 쪽이 오히려 진짜 책처럼 느껴진다.

같은 시기에 선택한 에릭 홉스본의 『혁명의 시대』에 프랑스 혁명이 너무 짧게 소개된 데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밧뜨, 책은 훌룡하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도 아니고 단일 사건도 아닌 몇백년에 걸친 근대사를 일관성있는 시각과 탄탄한 구성으로 훑는데 이는 내공의 힘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에릭 홉스본 이후로 좌파 시각의 역사에 대해 쓴다는 것은 홉스본의 저작에 주해를 다는 것 뿐이라는 말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한마디로 그런 사람이다. 참고로 에릭 홉스본은 이 〈혁명의 시대〉는 이중혁명(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 따른 자본주의 세계의 형성과정이라고 말한다.)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교과서같은 책이다.

알베르 소부울의 책에는 영웅도 없고 드라마도 없다. 물론 당시의 의회의 형성과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논쟁과 혁명을 고비 때마다 살려낸 세 번의 민중 봉기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지만 소부울은 조세제도, 화폐제도, 경제제도, 농촌 생활의 궁핍함, 파리의 빈민들의 열악한 생존 환경, 약진하는 부르주아 계급과 특권층의 대립에 따른 정치제도의 변화, 주변 국가의 프랑스에 대한 견제등 당시의 사회·경제·정치·역사적 상황들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 당연히 당시의 명사들, 루이 16세,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마라, 당통등의 개인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은 결국 어느 위치의 점유자일 뿐이다.

『프랑스 대혁명사』(상) 권은 1789년부터 1793년까지 부르주아가 사회 전면에 등장하고 민중들의 궁핍이 극에 달하면서 삼부회 구성, 테니스 코트의 선언, 바스티유 습격, 왕정의 몰락, 루이 16세의 도주와 체포, 전쟁 발발, 지롱드파의 몰락과 공포정치 시작에 이르는 동안의 상황들을 숨가쁘게 쫓아간다. 왕정, 특권층(귀족), 부르주아, 민중(상퀼로트)의 네 개의 세력이 대치하고 프랑스 혁명을 저지하려는 외국의 개입이 계속되면서 혁명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처음에는 왕정을 견제하고자 부르주아와 손을 잡았던 특권층이 부르주아가 권력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자 다시 부르주아와 대립하고 민중의 뒤에 숨어 특권층을 격퇴한 부르주아는 다시 민중을 제압하고자 혁명을 '얼어붙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프랑스 대혁명의 진행과정 내내 변하지 않는 것은 권력에 대한 탐욕, 기득권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권력자의 무자비한 폭력이고 혁명을 분쇄하려는 왕정,특권층,외국의 공세에 맞서 혁명을 지켜내는 것은 언제나 민중이다. 거리에서 전쟁터에서 싸우고 죽어나가는 이들은 늘 민중이나 법을 제정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정책을 집행하는 이들은 의회 안에서 말로 싸우는 자들이다.

물론 이들도 실제적 죽음을 맞기는 한다. 의회 안에서 상퀼로트와 연대했던 산악파가 전쟁에 이기는 것보다 혁명을 중단시키기를 바라는 지롱드파와의 타협을 포기하고 민중이 권력을 장악하는 쟈코뱅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공포 정치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동안 기득권층에게 학살당한 민중들의 수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이름값 있는 명사들이 단두대로 보내진다고 굳이 이들의 죽음에만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듯 싶다. 결국 '공포'는 '그들'의 공포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이 쟈코뱅 공화국의 혁명령 시기를 '공포정치'로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로 보는 부정적인 인식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쟝 마생은 물론이거니와 에릭 홉스본이나 알베르 소부울은 이 때의 '공포정치'를 경황상 독재가 불가피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한다. 에릭 홉스본은 공포정치, 즉 쟈코뱅 공화국 시기를 "자신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유효한 방법"이었다고 역설하며 알베르 소부울 역시 공포정치를 시행해야 했던 필요성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을 저지하려는 반동 세력의 끊임없고 집한 도발에 맞서면서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하는 주변 국가간의 전쟁을 함께 치러내고 있었다. 아시냐의 가치가 하루 아침에 반토막 나버리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먹을 빵이 없는 식량난 속에서 특권층과 부르주아는 오직 소유권에 대한 자유만을 인정하고 자기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데에만 눈이 벌개진 채 심지어 외국과 내통해 혁명세력, 자기 나라의 민중을 말살시킬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을 절대왕정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민중이었는데 민중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고 심지어 외국군대 앞에 생명을 위협받고 있었던 것이다.

도처가 민중의 적이었다! 프랑스 민중들이 국가·국민 개념을 형성하게 된 것도 이 때라고 한다. 혁명을 지키는 것이 곧 국가를 지키는 것이었고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 곧 국가를 팔아치우는 것이었다. (소부울은 루이16세가 알려진 대로 멍청하고 우유부단한, 무력한 한 인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외세를 끌어들여 자신의 국민들을 학살하고 왕정을 복고시키려 했던 영악한 왕이었다고 말한다. '비운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가 정부 페르젠과 계획한 일도 자신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를 불러들여 프랑스를 짓밟게 하는 일이었다.)

안팎의 적에 둘러쌓인 고사 상태의 프랑스 민중들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승리를 불러온 것은 오직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혁명의 원동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동세력을 물리쳐야 했고 그결과 혁명을 멈춰 세우려 전쟁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의 승전으로 계산이 빗나가버린 지롱드파가 숙청되고 쟈코뱅 공화국이 건설되었다. 그것이 "프랑스 혁명기간 중 가장 냉혹하고 영웅적이었던 시대(에릭 홉스본)"이었던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공포정치는 왜 실패했을까? 에릭 홉스본은 산악파(쟈코뱅)과 민중(상퀼로트)간의 균열이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말한다. 쟝 마생도 인정했듯이 로베스피에는 민중 없이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속해있던 중류계급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는 루소 사상의 세례를 받은 계몽주의자였고 민중은 계몽의 대상이었다. 에베르와 같은 보다 급진적인 상퀼로트 지도자를 과격파라는 이유로 숙청하면서 상퀼로트와 쟈코뱅간의 동맹에는 균열이 생겼고 산악파가 반대파에게 독재자로 지목당해 숙청당할 때 민중은 봉기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가 계급의 한계를 넘어 진정으로 민중과 함께 했다면, 공포정치가 민중과 유리되지 않고 진정한 민중 독재를 펼쳤다면 프랑스의 이후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 모델을 제공(에릭 홉스본)"했다. 소부울의 프랑스 혁명사를 읽다보면 왜 공산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독재'라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생각함다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헌법 1조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도 결국 "국민 독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소부울의 『프랑스 대혁명사』의 가장 큰 장점은 특정한 개인 또는 사건에 초점을 맞춘 자극적인 서술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을 쫓아간다는 것이다. 그의 책에서 반동세력에 맞서 혁명을 주도해나가는 것은 프랑스 민중이다. 1700년대 후반이니 지금으로부터 300년도 더 된 그때, 바로 직전까지도 절대 왕정의 치하에 있던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급진적인 사고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혁명을 밀어붙이는 모든 원동력의 근원이었던 이들의 혁명의지는 당시의 지식인들이 넘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리고 있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 봉기한 것이라지만 이들의 극적인 자각은 놀랍기만 하다. '집단 지성'의 기적이라고나 할까 물질적 변화는 정신을 변화시키고 자각한 정신은 물질적 현실을 뒤엎는다.

'부패할 수 없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관심이 주였던 나지만 그보다 민중이 더 급진적이고 더 위대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을 만든 것이 아니다. 혁명이 로베스피에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혁명을 만든 이들은 프랑스 민중이었다.

끝으로 에릭 홉스본이 수려한 필체로 로베스피에르를 묘사한 글이 너무 뽀대나서 인용해 본다. 분명히 혁명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있었지만 민중과 일체가 되는 것에 실패해 결국 민중의 외면 속에 기득권층에게 죽임을 당한 로베스피에르를 보며 누군가가 떠올랐다면 너무 심한 비약이겠지 -.-

"미덕을 개인적으로 독점한, 다소 과도한 의식을 지닌 멋쟁이. 이 냉철하고 광신적인 변호사에 대해 냉정했던 역사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인간도 중립일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영광스러운 혁명력 2년의 체현자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은 아니며 편협했으나 혁명을 부상시킨 인물 중 그 주위에 숭배가 생겨났던 유일한 인물. 그에게 쟈코뱅 공화국은 전쟁 승리를 위해 창출된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정의와 미덕의 무섭고도 영광스러운 통치이며 이러한 통치 아래 국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선량한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였고 인민들은 반역자들을 죽였다. 그는 공식적인 독재권력은 물론 심지어 관직도 없는 공안위원회의 한 위원에 불과했으며 그의 권력은 인민의 권력이었다. 인민이 그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했다."

by niji | 2011/11/04 17:31 | 독서의 괴로움 | 트랙백 | 덧글(0)

당명 개정이 시급하다는 홍반장에게 네티즌들이 보내는 한마디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한나라당이 x줄이 타나보다. 정신차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직도 정신줄 놓고 있는 듯 나꼼수 고발, 공지영 작가 조사 요구, 안철수 원장에게 서울대 예산 삭감하겠다며 압박등 보복조치에 여념이 없고 fta 강행처리하겠다면 나경필이 거품을 물고 있는 동안 우리의 충실한 견찰들은 조폭은 안잡고 국회로 "난입"하는 fta 반대 시위대를 때려잡고 있다.
이와중에 내가 왜 물러나냐며 일부 의원들의 소심한 쇄신 요구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취급하고 있는 홍반장은 선거패배로 사알짝 침체된 한나라당에 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당명 개정을 하겠다고 한다.
그렇다! 홍반장에게 중요한 것은 인적 쇄신도 정책 변경도 지도부 총사퇴도 아닌 바로 당명 개정이었던 것이다! 이에 네티즌 역시 큰 호응을 보이며 한나라당의 새 당명 공모에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보이고 있으니 이 모든게 홍반장의 공덕이라 칭송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쉽게도 유머감각과는 백만광년 떨어져 있는 나이기에 다른 이들이 이 기사에 올린 지나치기 아까운 주옥같은 댓글들을 모아 보았다.
일단 네티즌들이 추천하는 당명들이다
"경로당" "간당간당" "어버이연합당" '병역면제당" "개나라당" "불한당" (오 참신하다)  "일억당" "일제잔당" (이것도 좋다 )
"좆같당" (딴지일보에서 좋아할 듯한 당명이다 자매품 개같당도 있다) "나만된당" "주어없당" "졌다고볼수없당"

그 외의 멘트들이다

"똥 덩어리가 이름 바꾸면 고추장되냐......"

"고기집이 원산지 속여 팔다 걸리면 내부사정으로 한 두어달 쉬다가 가게 이름 바꿔 오픈하는 그런거?"
  - 감이 딱 온다. 통찰력이 돋보이는 댓글이다.

"정신 못차리는 니놈들에겐 숭구리당당 정도가 어울려 게다리춤이나춰라. "
  - 친근한 농담 같지만 분노가 느껴진다.

"이름 바꾸고 이것은 한나라당이라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하려고?"
  - 뉴스 꽤나 보는 사람이다. 내공이 느껴진다.

"사실상 이겼당"
  - ㅋㅋㅋㅋㅋㅋㅋ

"청와대는 분수대로 바꾸고 한나라당은 뚜껑당 추천이다"
  - 1+1 행사로 청와대까지 개명해 준 착한 네티즌이다.


이러다 오늘도 3시에 잔다 ㅆ ㅂ



by niji | 2011/10/29 02:43 | 그외 | 트랙백 | 덧글(0)

고전이 왜 고전인지 알려준 영화 두편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하워드 혹스)

헐리우드 고전과 마릴린 먼로에 대한 선입견을 날려버린 영화.
시골의 작은 마을이나 뉴욕,파리와 같은 대도시나 '어디서나 똑같은' 남자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만천하에 공표하며 누비는 제인 러셀과 마릴린 먼로의 버디무비.
페미니즘 영화라 해도 좋을 이 영화는 처음 목표대로 로렐라이는 부자를, 도로시는 미남을 쟁취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며 말소해버리는 일명 '위대한 사랑'의 폭력성에 통쾌하게 어퍼컷을 날려버리는 영화.
마릴린 먼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똑똑하기까지 하다.
"돈많은 남자는 미인과 같아요. 남자들은 미인을 좋아하죠. 아름다와서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에 빠지는 데 큰 역할을 하잖아요. 따님을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 보내시겠어요? 따님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죠? 왜 저는 그런걸 바라면 안 된다는 거죠?"
먼로가 핑크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노래하는 장면은 가창력을 떠나 이 영화의 백미. 왜 마릴린 먼로가 "만인의 연인"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쾌락] (막스 오퓔스)


모파상의 진가는 단편소설에서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모파상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쾌락]은 모파상의 탄탄한 원작과 막스 오퓔스의 시각적 테크닉이 환상궁합을 이룬 영화라는 것은 확실하다.
[여자의 일생]에서 말하듯이 인생은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 이 인생관이 [쾌락]의 3개의 에피소드들을 관통한다.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듯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걸 보면 모파상도 타고난 이야기꾼 기질인 듯. 파리의 고급카페의 창녀들이 주인 사장의 조카딸 영성체에 참석하러 시골로 나들이갔다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두번째 에피소드는 별다른 클라이막스 없이도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관찰력이라는 말이 다시금 떠올려지는 영화. 카메라의 움직임도 모델의 움직임처럼 우아하고 유연하다.

by niji | 2011/10/23 17:04 | 영화 | 트랙백 | 덧글(0)

"우리는 99%다" 반월가 시위에 대한 단상

지난 주말엔 "국제 행동의 날"로 전세계에서 반금융권 시위가 열렸다. 월가에서 비양심적인 금융재벌에 대한 저항시위가 전세계로 퍼진 것인데 뚜렷한 주도세력 없이 SNS를 이용한 시민들의 참여가 주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랍의 봄'의 서구버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국 여의도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도 시위가 열렸는데 참여인원은 최대 천여명 정도. 갑작스러운 기온 급하강과 가을비를 동반한 기상악화도 이유가 됐었지만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에 항의하며 백만명의 인원이 서울 한복판을 점령해 버렸던 대한민국의 저력을 감안한다면 호응도가 그다지 높지는 않았던 듯하다.
미국과 유럽을 뒤덮은 반금융권 시위가 왜 한국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일까?
많은 우려와 기대를 낳고 있는 반금융권 시위는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신문기사들을 보다보니 이런 의문점이 생겼다.

첫째, 한국에서 반금융권 시위가 소규모로 그친 것은 아직 금융권이 직접적인 공격대상이 아니어서가 아닐까 싶다. 저축은행 사태등등이 터지면서 금융권 역시 정치권, 대기업, 언론에 이어 도적놈으로 데쓰노트에 오르내리고는 있지만 아직 제1 원흉은 아니다. d이는 아마 자본주의 역사가 서구보다 한국이 짧다는 이유도 있을 듯 하다. 금융이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사실은 이미 백여년 전에 MARX 선생이 고지한 바 서구사회에서는 공장, 기업등을 거쳐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금융권에 이르렀지만 자본주의의 후발주자였단 한국 사회는 아직 그 단계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는 의식적인 문제일 뿐 어차피 지구촌이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는 금융권에 대한 분노도 제대로 점화된다면 대규모 시위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비슷한 맥락일지 모르지만 더 큰 이유는 아직 우리가 금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가 아닐까. 저축은행 사태가 터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재테크 금융상품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주식으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 금융권을 적으로 돌릴 확률은 낮을 듯 하다. 말하자면 반금융권 시위에 제대로 불이 붙으려면 주식등을 비롯한 금융상품으로 돈을 벌 수 있을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절망감이 우선되어야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반월가 시위는 사람들에게 '우리 일'이라기보다는 '남의 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제 행동의 날"도 몇몇 단체가 구색을 맞추려 참여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며 우리에게는 다른 산적한 문제들도 많다. 현실적으로 FTA 반대에 총력을 쏟으며 그 장 안에서 다양한 의제들을 짚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둘째, '월가를 점령하라'고 시작된 반금융권 시위가 전세계로 번지고 있지만 구심점이 없다는 것, 시위자들의 요구사항이 중구난방이란 것등이 지적되면서 장기화가 되갈수록 시위의 동력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과연 반금융권 시위는 구체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사실 68혁명도 미국산 쇠고기 개방 반대 시위도 시작은 미미했다. 그 끝이란 것이 과연 있을지, 끝난다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국 사회민주주의 이론가인 헤럴드 라스키는 혁명이 일어나려면 세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민중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직하고 있을 것/ 둘째, 민중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셋째,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을 남김없이 행사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는 것.
첫째 조건은 이제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점이 지적되며 다른 사회제도를 숙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개인적으로 반월가 시위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제기되는 것을 보며 정말로 자본주의가 위기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자,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설레발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은 멀었겠지만, 바로 몇년전과 비교해도 정말 사회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둘째 조건은 아직 시기상조다. 아직까진 사람들은 폭력을 동반한 혁명은 원치 않는듯 하다. 투표로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한국에서도 서구에서도 가지고 있으며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 유명인사들이 시위에 공감을 표하는 것도 유화책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화당을 의식한 오바마가 반월가 시위에 공감을 표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월가에서 오바마에게 후원금을 덜한다는 정도겠지만 누구든 피를 흘리는 것은 두려워하기에 빈말이라 해도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세번째 조건이 요구되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느끼는 피를 동반한 희생에 대한 두려움, 그에 따른 평화적 해결책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어디서든 시위가 시작될 때 시위대들은 누구보다 질서를 준수하며 뒷정리도 모범적으로 한다. 언제부턴가 진보에게는 도덕적 덕목이 강하게 요구되었고 기득권층이 돈과 권력을 장악할 때 진보의 무기는 도덕밖에 남지 않았기에 책 잡히지 않으려면 잘 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금융권 시위도 폭력을 쓰지 않는 것, 자발적이고 즐거운 분위기로 마치 축제같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점이 높게 평가되고 있는데 어느 시위든 그렇듯이 장기화되면서 '과격한 불순분자'들의 유입될 것이다. 지금도 초기보다 홈리스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이들이 바로 자본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란 점에서 사실상 시위의 중심에 서야 하겠지만 이들을 "열린 사회의 적들"로 경계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까지 시위대들은 이들에게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만일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보수층이 개떼처럼 물어뜯는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이런 딜레마는 늘 되풀이되는 것 같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반동세력과 싸우며 반동과 수시로 붙어먹으려 드는 온건파(지롱드파)와 폭력을 동반해 너무나 앞서나가면서 반동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던 과격파를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택했다. 공포정치를 통해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로 못박아 버린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역사가들은 전시상황에 혁명을 이어가야 했던 궁여지책으로 생각보다 너그럽게 평가해주고 있다. 그러나 궁여지책이라고 해도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양쪽에 공격당하고 숙청당했다.
세상을 바꾸려 수레바퀴를 돌릴 때는 당연히 천지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이때 발생하는 다양한 진동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관리하지 않으면 변질될 수 있고 관리하려 들면 동력이 사그라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반금융권 시위가 잦아든다 해도 자본주의에 본질적 의문을 제기한 시위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다. 당분간은 패배감에 젖는다 해도 월가를 점령하고 브뤼셀까지 행진했던 공간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수많은 패배와 좌절을 겪고도 아직도 때만 되면 끓어넘치는 한국의 위대한 냄비들을 봐도 민중은 쉽게 패배할지라도 영원히 패배하진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결론은 서울시장 투표 잘 합시다 ;;;

by niji | 2011/10/17 13:58 | 그외 | 트랙백 | 덧글(0)

나경원 트윗 자화자찬에 대한 댓글들

서울시장 나경원 후보 트윗에 주루룩 올라온 손발이 오그라드는 칭찬글들이 바로 나경원 본인의 계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웃음거리가 됐다. 나후보 측에서는 이들을 삭제하고 시스템 충돌로 인한 계정연동 오류라고 해명했는데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트위터에서 오류가 난다면 아예 글이 올라오질 않고 설사 이상이 있어 수정했다면 본래 계정으로 나타나야지 삭제한다는 건 그사람 계정이 아닌 담에야 불가능하다고 한다. 세상에 나같은 컴맹만 있는게 아니니 나경원 후보는 눈 동그랗게 뜨고 아는 척만 하지 말고 그냥 하던 대로 북한 소행이라고 하는 게 나을 뻔 했다. 저녁때 올라온 기사일 텐데도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황당한 해프닝이라 2,000여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말 그대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나경원 측에서는 아마 이를 자신의 지지율이라 판단하고 즐거워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나도 나경원 후보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싫지만 "자위녀"라는 호칭엔 거부감이 들어 쓰기 싫고 이런 댓글은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근데 나경원은 맘에 들었나 보다. 하는 짓마다 "헐 자위하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으니..
정치판이 저질이 되다 보니 네티즌들의 유머도 말라가는 느낌이었는데 모처럼 네티즌들의 유머감각이 불꽃처럼 살아났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댓글을 한번 모아 볼까 한다.

"이명박은 안해본게 없고 박근혜는 해본게 없고 북한은 못하는게 없고 나경원은 제대로 하는게 없다 "
  - 토 달 것이 없다. 머리속에 쏙쏙 들어온다.

"내 계좌는 이건희와 연동안되나? "
  - 웃기는 것을 넘어서 어려운 사회현실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나온다.

"지금 상대방 흠집내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Q : [나경원의 네거티브]를 넉자로 줄이면??  A : "나거티브"

"쥐새끼는 셀프기부, 오세이돈은 셀프탄핵, 자위녀는 셀프칭찬"

"알바 간에 충돌이 일어나 알바연동 오류"
 
"떨리는 목소리로 진정성을 가늠하는거면 염소는 대체 얼마나 진정성이 쩔어주는거니?"
  - 나경원 스스로 단 트위터글 중 "떨리는 목소리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라는 글이 있었음.
    한나라당 디지털 특공대(일명 알바)가 되려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

by niji | 2011/10/17 01:43 | 그외 | 트랙백 | 덧글(0)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내 맘대로 순위

1위 [파우스트] (알렉산더 소쿠로프)

러시아의 영상미와 독일의 고전이 만나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바로 그 영화. 소쿠로프 감독의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을 축하하는 차원에서 부산까지 갔는데 의외로 영화제에서 별로 언급이 안 됐음. 감독의 명성으로나 영화의 질로나 무시할 영화가 아닌데 혹시 타영화제 수상작에 대한 견제인가..-.-..
개인적으로 소쿠로프와 타르코프스키가 어떻게 다른가를 여실히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됨.
괴테의 비극을 각색한 영화가 아니라 그 행간에 무엇이 있는가를 읽는 작품이라는 프로그래머평을 보고 엄청나게 난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갔는데 생각보다는 원작에 충실해서 한시름 놓았다. 괴테의 [파우스트] 중 "그레트헨 비극"을 소쿠로프 식으로 영화화했는데 러시아풍과 독일풍이 함께 느껴지는 듯 하다. 러시아어도 독일어도 모르니 알 수가 없지만 느낌상 러시아어가 아닌 독일어로 촬영된 영화같았는데 맞는지?
카메라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어내는 데 둘째 가라면 서러운 소쿠로프 감독의 영화답게 영상미는 죽여줌.
감독의 회화에 대한 애착과 해박한 지식과 느껴지는 것이 전체적으로 짙은 청색이 도는 배경에 세세한 미쟝센이 마치 고전주의 회화를 그대로 화면에 재현시켜 놓은 것 같다. 심지어는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연극을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의 몸짓이나 표정까지도. 특히 마르가레테는 그냥 그림 속에서 나온 듯.. 남자들이 한눈에 반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짐.
영상미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영화라 생각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소쿠로프 감독이 파우스트를 어떻게 독창적으로 해석했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좀 아쉬웠음.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스토리였음. 궁핍에 허덕이면서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탐구하는 소득없는 연구에 매진하던 파우스트 박사가 전당포를 운영하는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를 만나 부와 사랑(혹은 욕망)을 얻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하고 블라블라블라... 내가 아는 [파우스트]의 줄거리는 이정도인데 소쿠로프 감독의 영화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괴테의 "그레트헨 비극"과 다른 점은 결말에서 괴테는 신의 구원에 의지하지만 소쿠로프 감독의 영화에서는 구원해 줄 신이 없다는 거다. 결국 인간은 호몬쿨러스를 만들듯 스스로를 구원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같이 광야에 홀로 헤매는 것처럼 너무나 외로운 일이라는 거..



2위 [우리에게는 교황이 있다]
(난니 모레티)

여전히 유쾌하고 도발적인 난니 모레티!



베를루스코니같은 양아치가 장악한 이탈리아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난니 모레티가 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각과 예리하고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지닌 난니 모레티의 반가운 신작.
내가 본 난니 모레티의 영화중 제일 웃기는 듯 ㅎㅎ개봉해도 어느정도 통할 것 같은데 설마 신도들이 반발하는 건 아니겠지 ㅎㄷㄷ
난니 모레티가 정신분석의로 직접 출연해서 명연기를 보여주는데 역시 이탈리아 남자는 거지도 잘생겼다는 말이 어느정도 맞는 듯.
난니 모레티의 이름값을 하긴 하는데 역시 민감한 종교적 소재라 그런지 영화가 평범하다는 느낌- 예상 가능한 결말-이 드는 게 좀 아쉽다. 엄숙하고 경건한 바티칸의 이면을 보여주는 건 좋았는데 거기까지, "사제도 인간이다'라는 휴머니즘 가득한  훈훈한 분위기로 끝난 듯.
알모도바르 가 [나쁜 교육]에서 보여준 종교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기대했는데..ㅠㅠ.. 핀트가 좀 달랐던 듯.





이 사람이 바로 난니 모레티 감독.. 잘생겼음 ㅎㅎㅎ



3위 [댓 썸머] (필립 가렐)

90분동안 루이 가렐을 본 것으로 만족하자



관객들이 좀처럼 공감하기 힘든 땅파기(별다른 이유없이 벌어지는 연인들의 갈등과 고뇌)로 악명높은 프랑스 애정영화의 나쁜 예.
주인공이 화가라는 점과 혁명이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연인들]의 연장선으로도 보이나 드라마를 연장할 때 좋은 반응 을 얻기 힘들다는 점만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부르주아이길 거부하는 부르주아들의 권태에 찌든 그들만의 성 안에서의 감정 과잉이 아쉽다.
거의 스무살 차이가 나는 루이 가렐과 모니카 벨루치 커플의 앙상블이 의외로 훌룡하다는 말이야 듣고 보긴 했지만 루이 가렐은 실생활의 영향인지 정말 연상녀와 있을 때 더 잘 어울리는 듯. 중간 중간 나오는 그림은 좋았다.
영화에 실망한 마음이 비주얼을 추구하려 했지만 루이 가렐도 많이 늙었구나.. 이제 28살인데 서양인이라 그런지 예전의 샤프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솔직히 모니카 벨루치 뚱뚱해지지 않았나.. 얼굴은 참 예쁜데 몸매가 ㅠㅠ 옆에 젊은 여배우랑 비교됨.






4위 [유령](주아옹 페드로 로드리그쉬)

저질체력이 안 따라줘서 진가를 알 수 없었던 영화 미안하다


"미래의 거장을 알린 놀라운 데뷔작으로 동성애에 대한 처절한 고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용기,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성이 돋보인다. 2001년 베니스영화제 경쟁 상영작."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추천평으로 감상을 대신하겠음.

역시 하루에 세편의 영화를 보는 건 내게 무리인 듯. 마지막 영화인데다가 어두워서 잘 분간이 안가는 화면, 대사없음등의 악재가 어우러져 집중이 안되고 중간 중간 졸았다.
감독님 미안.. 영화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는데 감독님 훈남임. 스타일은 좋았어요... [브로큰백 마운틴]같은 영화는 별로라고 하셨죠. 감독님의 적나라하고 본능에 충실한 영화를 보니 십분 이해가 가는데 저는 소프트한 관객이라 ..-.-.. 그래도 화이팅입니다! 실험정신 좋았어요! 개만 많이 안 나오면.. 감독님은 개를 통해 주인공이 아직 소년이란 걸 보여주려 했다고 하셨는데 전 개랑 물고 빨고 하는 걸 보다보니 사람인지 갠지 영 헷갈려서리..-.-.. 제가 동물영화 안 좋아해요. 거기다가 개는 상극.. 차라리 고양이였다면 영화에 더 집중했을지도.. 죄송함다!
나와는 잘 안 맞았지만 새로운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라는 것은 확실! 하지만 한국에서 개봉할 확률은 0.00000001%임. 야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어둠의 경로로 돌지도 모르나 그것만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입에서 욕나올 듯.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감독님은 참 괜찮은 훈남임. 한국에서 좋은 기억 갖고 돌아가시고 내년에 또 오시기 바람.
 



5위 [하비비] (수잔 요셉)

레스트리스를 놓친 울분 때문에 된서리 맞은 면이 큰 영화 너도 미안하다


[레스트리스] 티켓팅을 바로 코앞에서 실패하고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영화라 억울하게도 내게 이미 점수 깍이고 들어간 영화.
팔레스타인 영화고 나름 언급이 많이 된 것 같아 선택했는데 성과는 그닥 -.- 멜로영화를 선택한 내 잘못임.
옛 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 팔레스타인 현실과는 별 연관성이 없었음. 다큐외에 극영화가 제작되기 힘든 팔레스타인에서 해외와의 협력없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거의 최초의 극영화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듯. 그래도 여주인공은 예뻤음.













by niji | 2011/10/13 14:23 | 영화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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